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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BOLIC
2026년 7월 29일(수) - 2026년 11월 1일(일)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2026년 기획전시로 「SYMBOLIC 심볼릭」 전을 개최한다. 상징은 시대와 문화,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개인의 맥락에 따라 유동적인 서사와 영적·무의식적 의미를 담아낸다. 지금 이 시대에도 과거에 이미 사용되어 온 것을 다시 새롭게 차용하거나, 잊혀진 것 위에 다른 의미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수많은 상징들이 끊임없이 변주된다. 그렇다면 과연 완벽한 상징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상징(symbol)이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 < 심볼론(symbolon) >에서 비롯되었다. 하나의 사물을 둘로 쪼개어 나눠 가졌다가, 훗날 두 조각을 다시 맞추어 서로를 확인하던 신표(信標)가 그 원형이다. 즉, 상징은 처음부터 완결된 진리가 아닌, 나뉘고 결여된 개념의 조각들이 다시 만나야만 비로소 성립되는 관계이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다.

이번 전시는 완결된 명사로서의 < 상징(symbol) >이 아니라, 영원히 쪼개진 채 완벽할 수 없는 형용사적 상태—즉 < 상징적인(symbolic) > 것들이 품은 불완전성의 현실성에 주목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세 명의 작가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는 불완전함을 가시화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징적인 것들을 사용하고 재구성한다.

전시는 홍세진의 작업에서 시작한다. 감각의 어긋남을 회화라는 언어로 기호화하려는 그의 시도는 끝내 완전한 기호에 이르지 못한 채 상징에 더 가까이 머무르며, 상징이라는 약속의 표식이 애초부터 품고 있던 불완전성을 그대로 비춘다. 이어지는 정수정의 작업은 미술사와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익숙하게 사용되어 온 모티프, 그 이면에 감춰져 있던 인간의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야생성을 폭로하며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상징의 표피를 전복한다.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이준아의 작업 앞에서, 처음의 의미로부터 오염되어 이제는 키치한 문양처럼 떠돌던 도상들은, 물감이 엉기고 겹쳐지는 혼란 속에서 오히려 근원적인 아우라를 되찾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과연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가 불완전함 속에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미완으로 남긴다.

ㅡ 형다미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선임 큐레이터
48._이준아,_만다라(천체),_2024,_캔버스에_아크릴릭,_폴리머_스프레이_페인트,_192_x_192_cm_.jpg
이준아|SYMBOLIC_layer
 
이준아는 인간의 < 광기 >를 탐구하며, 책이나 온라인 등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저마다의 맥락 속에서 본래의 의미가 오염된 채 소비되는 도상들을 수집한다. 작가가 광기에 몰두하게 된 배경에는 민주화 운동 중 고문을 겪고 평생 정신질환을 앓았던 아버지의 서사가 자리한다. 부모님의 서재에서 수많은 장서 속 도상들을 보며 성장한 그에게, 도상을 모아 화폭에 겹겹이 쌓아 올리는 행위는 아버지를 향한 애도이자 그를 이해하려는 사랑의 방식이다. 나아가 이는 개인의 짙은 상흔을 인간이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보편적 본질과 연결 짓고 확인하는 의례이기도 하다.

이준아의 화면은 이질적인 상징들이 제의적 도형처럼 거대하게 펼쳐진 형태를 띤다. 초기작 「운문」(2018)과 「역」(2018)에서 보여준 절차적 회화 실험은 현재의 레이어(Layer) 작업이 구축되는 개념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프랙털 연구」(2020) 시리즈는 무한히 증식하거나 감소하는 등비급수의 수학적 규칙과 옵아트(Optical Art)의 기하학적 착시를 조합한 화면을 통해 집단 환각과 같은 시각적 경험으로 연결하고자 한 실험이었으며, 이후 이준아 작업의 조형적 바탕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집중하는 주제를 담은 도상을 수집하는 일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가 선호하는 도상은 본래 성스러운 상징으로 탄생했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며 타투나 상업적 장식으로 소비되어 버린 < 오염된 > 상태의 것들이다. 이렇게 선택된 이미지들은 컴퓨터를 통해 다듬어지고 정교한 시트 재단 과정을 거쳐 물리적인 틀로 제작된다. 이후 틀에 물감을 두껍게 바르고 떼어내는 스텐실 기법을 통해 도상들은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이는데, 물감을 밀어 올리고 뜯어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벗겨진 허물 같은 텍스처는 그 자체로 묵직한 시간성과 물질성을 획득한다.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신성을 상징하는 십자가, 광기를 상징하는 뱀은 이준아가 선택한 수많은 도상 중 일부다. 작가는 이것들이 지닌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수히 형상을 덧씌우지만, 역설적이게도 층위가 겹칠수록 본래의 형태는 모호해지며 화면은 마치 지우고 다시 쓴 양피지(palimpsest)처럼 변모한다. 의미의 명확한 독해보다 무엇인지 알 수 없음에도 전해지는 강렬한 아우라를 좇는 작가에게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폐기된 도상들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압도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준아의 캔버스는, 낡은 상징들을 새롭게 품어내는 거대한 성전이 된다.
정수정_작품31(Display_P3)_수정.jpg
정수정|SYMBOLIC_shadow
 
정수정은 미술사 속의 전형적인 도상들과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 같은 익숙한 형태들 안에 낯선 긴장을 불어넣는다. 작가는 섬세하고 가벼운 묘사로 정교하게 화면을 완성해 나가며, 그 안에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혼종적 존재와 뒤집힌 맥락의 도상들을 담아낸다. 작가는 시기별로 다른 시리즈를 전개하는 듯 보이지만, 전 시리즈를 관통하여 지속적으로 인간의 본성 속 어두운 동물적 본능과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을 담아낸다.

특히 거대한 화면을 무리 지어 가로지르는 새 떼나 쥐 떼를 그린 「Swooping」(2025), 「Surging」(2025)과 같은 작품들은 개별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거대한 흐름에 맹목적으로 휩쓸려가는 현대 사회의 집단 광기를 투영한다. 또한 「밤이 시작될 때」(2025) 등에서 마치 화려한 원석이나 보석 장식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구슬 형태의 군집은 포도송이와 같은 열매와 같기도 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곤충이나 짐승의 기괴한 알 무리를 연상시킨다. 이는 종족 보존이라는 직접적인 목적을 지닌 원초적 생식력과 섹슈얼리티의 은유로 작동하며,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색채 이면에 교묘하게 숨겨진 인간의 야성적 속성을 폭로해 관람객의 감각을 교란한다.

작가는 밝고 화사한 색과 그림체로 전형적인 관능성을 덜어낸 밋밋하고 매끈한 몸을 님프라는 오래된 고전 회화의 소재를 빌려 나체로 등장시키고(「붉은 석양과 태어난 자」(2018), 「오아시스」(2019)), 17세기 북유럽 정물화의 구도를 빌려 사냥한 동물 대신 사람의 머리를 배치하는 방식으로(「Lava」(2025)), 본능적 욕망의 매력적이고도 잔인한 양가적 측면을 가감 없이 이끌어내는 한 편,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는 전략을 취한다. 최근 정수정이 불특정 인물의 초상화인 트로니(Tronie)를 통해 이러한 속성을 인물의 모습으로 구체화하는 작업 또한 이러한 방향성의 연장선에 있다.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익명의 얼굴들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기에 인간이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감정과 내밀한 욕망을 담아내는 완벽한 그릇이 된다. 고전 회화의 무대적이고 극적인 장치들과 현대 애니메이션의 일러스트적 기법이 매끄럽게 충돌하는 화면 속에서, 작가는 이 가상의 존재들을 통해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진실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정수정이 기존의 상징을 뒤집어 그 이면에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를 담아내는 일은, 인간이 온전히 움켜쥘 수 없는 무의식과 세계의 원초적 서사에 끌려 만들어낸 인류의 가장 오래된 상징인지도 모른다.
11._홍세진,_숨겨진_표면,_2026,_캔버스에_유채,_227_x_182_cm_(1)_.jpg
홍세진|SYMBOLIC_flat
 
홍세진은 인공와우와 보청기라는 기계 장치를 매개로 감각하는 자신의 청각적 경험이 현실과 어긋나는 지점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타인에게는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가 자신에게는 소음으로 다가오는 것과 같은 감각의 차이는, 처음에는 불편함과 당혹감이었을지 몰라도 이내 자신의 감각 체계를 되짚어보는 실험적인 회화 작업으로 이어진다. 

초기작 「눈 앞에 있는 것들」(2017)에서 작가는 경기 장면을 중계하는 TV 속 화면과 창밖의 경기장이 함께 보이는 거실 풍경을 그린다. 작가에게는 들리지 않는 경기장 관중의 함성, 해설자의 목소리를 화면 중앙의 테이블에 프랙탈(fractal) 패턴 덩어리로 그려냄으로써 들리지 않는 소리를 데이터로 변환해 그린 이 작품은, 작가가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공와우와 보청기를 통한 자신의 청각 경험이 급격히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디지털 기술 환경이 감각을 단편화하는 지점에 일찍부터 주목해 왔음을 보여준다. 

이후 홍세진은 캔버스 평면을 접면(interface)으로 삼아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 기술적인 오류로 인해 분절되어 전달되는 감각 정보의 어긋남을 구현한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얹어 밀어내거나 긁어내는 방식으로 생성한 납작한 물감의 층들은 그 균일하지 않은 표면을 통해 실재를 완전히 감각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명시한다(「접힌 경계」(2025)). 작가는 작품 속 색면의 불규칙한 두께와 발림 상태에 따라 관람자가 기술을 통해 주어지는 감각의 생성과 소멸을 체험할 수 있게 하거나(「이어가다 움푹」(2023)), 초기 애니메이션 장치인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를 통해 움직이는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 같이 감각 채널 사이의 공백을 그리는 등(「다음 또 다음」(2025)) 감각이 부재한 오류와 노이즈를 구현하며, 새로운 지각의 발생을 담아낸다. 

작가가 지속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불완전함의 단차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점차 얇아질지라도 사라질 수는 없다. 그렇기에 홍세진이 그리는 그림 속 얇은 막들은 재현을 향해가는 미완의 층위를 품은 감각의 어긋남이며, 끝내 완전한 치환에 닿는 기호가 아닌 무수한 변수를 담는 상징으로 남는다.